가을 7-마주보기

너는 나를 등지고 누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런 너를 나는 바라보고 앉아있다.
언젠가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봐주길 바라면서.
마치 그곳에 네가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너가 있었을 때,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있었고, 5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런 나를 너는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때의 너도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너를 바라봐주기를 바랬겠지만, 많은 경우 그러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너는 구석진 너의 집 안으로 들어가 긴 잠을 청했겠지.

지금 너는 그곳에서 깨어날 수 없는 긴 잠을 자고 있다.
눈을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는 서로를 마주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20211008-가을이가 잠든 곳

가을 6-비양도, 협재, 금능, 모슬포, 송악산

80km, 6시간 40분 라이딩을 했다.
목 뒷부분이 가끔 따가울 정도의 햇볕과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시원한 바닷바람과 쉼없이 들려오는 파도소리. 이 모든 것이 지금이 바로 가을임을 말하고 있었다. 가을.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나는 그동안 휴일이면 대체로 오전엔 가까운 바닷가 라이딩, 오후엔 일주일 치 수업 준비를 했었다. 그러니까 아직 가을이가 항상 내 곁에 있을 때는 말이다.
함께 일하는 친구는 내게 하루 쉬는 날을 이용해 제주 곳곳을 다니면서 제주 생활을 즐기라고 했지만 할 일이 많아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닐 수 없었던 것은 해야 할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루종일 가을이를 혼자 두기 미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양이는 혼자서도 잘 사는 독립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나는 가을이가 혼자서는 외로움을 탔었다는 것을 안다. 몇 시간의 부재 후 돌아왔을 때 가을이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시크한 녀석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었는지, 그 말 없는 녀석이 마치 “대체 날 혼자 두고 어딜 다녀오는 거야?” 하듯이 짧게 야옹 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가을이답게 대놓고 반가움을 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침 9:20 배 시간을 맞추려면 1시간 안에 비양도행 배가 출발하는 한림항까지 이동해야 했다. 거리는 17km. 자전거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길이라 자전거로 움직인다는게 옳은 결정인지 망설여졌다.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는 좁은 차도라면, 경사가 생각보다 심하다면, 무엇보다 자전거로 간다면 되돌아올 체력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에 대한 계산이 잘 안 되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생각으로 일단 라이딩에 나섰다.

어떻게든 잘 되었다.
배 시간에 맞춰 한림항에 도착했고, 배에 자전거도 실을 수 있었다.
비양도에 머문 2시간 동안 비양도를 한 바퀴 돌고, 호돌이 식당에서 보말죽을 먹고, 비양봉에도 올라갔다. 비양봉에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니 섬이 정말 작았다. 섬 반대편으로 내려와 섬을 반 바퀴 더 돌고 나니 딱 돌아오는 배 시간에 맞았다.

20211005-비양도의 백구

한림항에 돌아와 왔던 길과는 다른 해안도로를 쭉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금능 해수욕장의 바다 색은 이전과 같이 매력적이었고, 신창해안로의 거대한 풍차들은 여전히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해안로를 따라 몇 십 km를 라이딩하니 마치 내가 제주도민인 듯 해안 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관광와서 자전거를 빌려 행복한 표정으로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아마도 육지에서부터 실어 왔을 자신의 자전거로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에 도전하는, 옷차림새나 자전거로 보나 전문 라이더 같이 보이는 라이딩 팀들. 순수한 운송수단으로 앞 바구니에 장 본 물건들을 가득 싣고 천천히 달려가는 노년의 주부들.
제각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있는 와중에 나는 혼자 아무 목적없이 아무 생각없이 반복적인 동작으로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다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80km, 6시간 40분을 타게되었다. 자전거로 나선 길은 어쨌든 자전거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으니…

피곤함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좋겠다 싶었는데, 다리 통증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을이 생각을 하다 새벽녘에야 선잠에 들었다.

가을 5-A Street Cat Named Bob (2016)

가을이를 떠나보낸 후 가을이가 내 팔에 남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파상풍 주사를 맞았고,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2년마다 제공하는 건강검진을 하고,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끝냈다. 건강검진과 백신 접종은 이전부터 정해진 일정이었으나 하필 가을이가 떠난 직후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이런 일들을 하게 되니 가을이에게 더 미안해진다. 가을이 건강을 미리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든다.

조금씩 옅어져 가기는 하지만 아직 혼자 있는 시간이 고통스럽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가을이가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혼자 잠들어야 할 시간이 되면 현실을 잊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화를 봤다.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 (A Street Cat Named Bob)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영화였다. 마약 중독으로 비참한 삶을 살던 제임스와 길 고양이 밥의 만남은 그 둘 모두에게 운명이었고, 그 후의 일들은 거의 기적이라 할만했다. 마약을 끊고 길거리 공연과 빅이슈 판매 등으로 힘겨운 삶을 버텨가는 오랜 시간들 속에 제임스와 밥은 항상 함께 있었고,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줬을 것이다.

항상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제임스와 밥은 2007년에 만나 작년(2020년) 밥이 교통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13년 동안 항상 함께 있었다.
https://www.thesun.co.uk/news/11909846/street-cat-named-bob-died-hit-car-owner-best-friend/

Street Cat Named Bob

가을 4-올레길 16코스

올레길 16코스를 걸었다.
15Km 남짓한 길을 3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올레길 16코스는 의외로 해안길보다 산길이 더 길었다.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 같았다. 원래는 17코스를 걸을 생각이었는데 진입로에서 실수로 방향을 반대쪽으로 잡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16코스를 걷게 되었다. 어차피 그저 지칠 때까지 걷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16코스인지 17코스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걷는 내내 가을이를 생각했다.
가을이가 아팠던 마지막 순간들만 떠올라 걸으면서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들을 애써 떨쳐버리거나 일부러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비대성심근증(HCM), 폐수종, 이뇨제, 혈전용해제, 후지마비.. 며칠 동안 귓가를 맴돌았던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몇 달 사이 눈에 띄게 움직임이 줄어든 가을이의 상태에 의심을 갖고 미리 병원에 데리고 가 검진을 했었더라면, 추석 연휴 이틀 동안 가을이를 홀로 두고 창원에 다녀오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었다면, 처음 증상을 보였을 때 제주시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가을이를 데리고 갔었다면…. 의미도 없는 가정들이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흐린 하늘의 하얀 구름 속에도,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의 하얀 포말 속에도 어디에나 아픈 하얀 가을이가 있었다.

20210928

가을 3-정리

아침에 일어나 가을이가 사용하던 물품들을 정리했더니 방 한 가득이다.
대형 후드 화장실, 포장도 뜯지 않은 모래와 사료, 간식들. 음수량 늘리는데 꽤나 도움을 줬던 세라믹 정수기, 가을이가 혹시나 탈출할까봐 현관에 설치해두었던 철제 팬스….
그중 쓸모 있을만한 것들을 골라 당근마켓에 올렸더니 올리자마자 거래 요청이 빗발쳤다.
절반은 오늘 모두 거래되었고, 나머지도 조만간 알 수 없는 어떤 고양이의 일용품이 되어 주겠지.

첫 거래를 하고 가을이를 찾아가 거래 사실을 알렸다. 네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미안하다고….

이것은 가을이를 잊기 위함이 아니다.
일상에서 무방비 상태로 가을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그런 슬픔을 이제 겪고 싶지 않았다. 가을이와의 추억은 내 맘 깊숙이 넣어두고 내가 준비되는 순간에만 그 안으로 들어가 살짝 만나고 오고 싶다. 그래야 좀 더 오래오래 가을이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20210927

가을 2-젖먹이 아기 고양이

가을이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낯선 우리 집에 적응하기 위해 꽤 많은 고생을 했다.
환경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 신세를 졌다. 링거를 꼽고 산소방 안에 눕혀진 가을이를 보며 신께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저 연약한 생명을 제발 지켜달라고.
신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다행스럽게 가을이는 곧 퇴원했고 언제 아팠냐는 듯이 이내 아깽이 짓을 해대기 시작했다. 우다다 우다다…

어떤 날은 젖병을 입에 대기 무섭게 허겁지겁 분유를 먹다가 젖병 고무까지 뜯어 삼켜버리기도 했지. 그날 난 또 하루 종일 고무 조각을 삼킨 가을이가 탈이 날까 두려워 온 신경을 곤두 새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온 지 이틀째였던가. 가을이가 처음 용변을 보던 순간이 기억난다. 따뜻한 물을 묻힌 거즈로 똥꼬를 살살 문질러줬더니 신기하게도 가을이는 화장실로 마련해 둔 모래 상자로 기어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아주 작은 한 덩이를 배출했고 그 물질을 덮으려고 연약한 팔다리로 모래를 휘져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가을이는 정말 고양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적어두었던 내 글을 보면 가을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때문에 꽤나 신경 쓰였었던 것 같다. 어렵사리 첫 발톱 깎기를 하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던가. 오래 고민한 끝에 사람 손을 깨무는 버릇을 고쳐주리라 맘먹고 달려들었었지. 양 손에 두터운 장갑을 끼고 가을이가 손을 깨무는 순간 살짝 때려줌으로써 사람 손을 깨물면 혼나게 된다는 것을 인식시키려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내 나름의 훈련을 시작한 지 10여분 되었을까, 이내 나는 가을이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가을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어서 마치 15라운드 내내 얻어맞으면서도 절대 뒷걸음질 치지 않는 복서의 불굴의 의지와도 같았다. 난 가을이의 의지를 인정해줬고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가을이를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이 생명체는 길들여질 수 없는 고결한 그 무엇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깨달았었다고는 하나 난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내 생각으로 가을이를 길들이려 했던 실수를 저질렀고 그때마다 뼈아픈 실패를 맞보고 또다시 깨닫는 것을 반복했던 것 같다. 가을이의 마지막 날도 그랬고….

그무렵의 난 이렇게 적고 있다.

주제에 맞지 않게 아가 고양이를 들였다.
중간고사에서 올백을 인정받아 선물로 들여온 아가 고양이를 보고 딸아이는 너무 좋아한다. 우리가 이 아가와 끝까지 행복한 시간들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아직 이름 없는 아가의 지금까지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2013. 9/15 인천 태생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1450, 2남 4녀의 아가 중 남아, 몇째인지는 알 수 없음.)
10/20 태어난 지 35일 만에 우리 집으로 입양
10/21 우리 집에 온 후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걱정을 안겨주던 아가에게 분유를 타주자 이를 처음으로 먹음
10/22 우리 집에 온 후 처음으로 응가함.
10/28 아침에 젖병 고무 꼭지를 씹어 삼켰는데 심히 걱정되는 상황. 응가로 나와야 할 텐데..

처음 우리집 에 왔을 때와는 달리 몰라보게 씩씩하고 과감해졌는데 혼자서도 우다다거리면서 잘 놀고 잘 잔다.
분유는 잘 먹는데 아직 물에 불린 사료를 겨우 조금씩 먹는 정도이고 분유를 떼고 사료로 넘어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손발톱은 한번 힘들게 깎아줘서 예리함은 조금 무뎌졌는데 이제는 이빨이 문제다. 살살 물어도 꽤 아프다.

아가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 줘.

2013년 10월 28일

201310??

가을 1-첫 만남

가을이를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딸아이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아이는 예쁜 아기 고양이를 갖고 싶어 했다.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동물을 지독히도 무서워했던 아내도 사랑스러운 딸아이의 순수한 희망을 언제까지나 모른 척할 수는 없었고 마침내 고양이 입양을 허가하고 말았다.
이제 입양할 고양이를 알아보는 것부터 고양이의 습성에 대해 학습하고 함께 지낼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 되었다.
딸아이의 요구 사항은 명확했다. 하얀색 페르시안.

2013년 9월 15일생이라 했다.
처음 가을이를 만난 순간, 나는 선택해야 했다. 같은 어미로부터 나온 여섯 마리 중 입양 보내고 남은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 그중 한 마리를 우리의 식구로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하얀 앙고라-페르시안 믹스였다. 코의 생김새로 봐서는 앙고라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가을이를 선택했을까? 다른 아이를 가을이로 선택했었더라면 또 결말이 달라졌을까?
어쨌든 나는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예뻐 보였던 가을이를 선택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펫 샵에 들러 고양이 분유와 젖병을 샀다.

201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