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저/이난아 역 | 민음사 | 원제 :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

간간이 소설 읽기를 즐기면서 마침내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그러하다.

마침 파묵의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므로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이 실제 그의 작품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느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이 책을 읽을 아주 길게 읽었다. 이 책을 읽는 기간 동안 파묵의 소설들 세 권(내 이름은 빨강, 눈, 하얀 성)을 함께 읽었다. 책이 어렵거나 잘 읽히지 않아서는 아니고 아마도 그의 소설관을 실제 그의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느껴보고 싶었나보다.

이 책은 강연록 형식이란 점에서, 또한 파묵이 화가대신 소설가가 되기를 선택했던 그의 젊은 시절에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흥분해서 중심부를 찾으며 읽었던’ 고전 소설들을 나 또한 읽고 싶다는 충동을 준다는 점에서 “책은 도끼다(박웅현)”의 느낌과 닮았다.  그러나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소설가로서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이 책이 갖는 독보적이고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파묵이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에 따라 중심부 생각하며, 소설 속 인물의 시각으로, 보다 성찰적인 독자가 되어 그가 젊은 시절에 읽었다는 고전들을 읽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쓰면서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배우게 됩니다. 니체의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라는 말은 지당하게 느껴집니다. (p177, 에필로그 중)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p12)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의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p18)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서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또는 ‘naive’한 동시에 ‘sentimentalisch’해야 하기도 하지요. 이 분류는 1795년에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p20)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p31)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p33)

내게 소설의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게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힘에 있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얼마나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소설은 삶에 관한 우리의 중심 사상에 호소해야 하고, 그러한 기대 아래 읽혀야 합니다. (p34)

2.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오히려 소설 예술은 독자와 작가 간에 허구에 대한 완벽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완전한 상상의 산물도 아니고, 완전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은 독자도 작가도 알고 합의한 것입니다. (p41)

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p52)

모든 소설가의 작품은 삶에 관한 수많은 작은 관찰들을, 개인적인 감각에 의거한 삶의 경험들을 전시하는 별자리와도 같습니다. 문 하나를 여는 것에서 옛 애인을 기억하는 것까지, 인간적인 온갖 세부 사항을 포괄하는 이 감각적인 순간들은 소설에서 다른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감의 순간들을, 개인적인 창조성의 지점들을 구성합니다. 덕분에 작가가 경험에서 직접 얻은 지식 또는 흔히 말하는 소설의 세부 사항이라는 것도 상상력과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p55)

작가와 독자 사이의 허구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소설 예술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일치와 거울 사이로 떨어지는 느낌은 소설 예술을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고하고 상상하여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에 호소합니다. (p57)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나는 소설 주인공이 나와 닮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온 힘을 다해 동일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소설 속 세계를 그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 그들을 상상하면서 서서히 실체를 완성해 나갑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p70)

이 동일화 과정은 천진하지만 전적으로 ‘소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이성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내 이성의 한편에서 나의 주인공들처럼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 일로 바쁠 때, 그리하여 점차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내 이성의 다른 한편에서는 소설 전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전반적인 구성 요소를 관장하고, 독자가 이야기와 인물들을 어떻게 읽고 분석할지를 계산하며, 내가 쓴 문장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려고 애씁니다.  이 모든 세세한 계산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는 반대되는, 자신을 자각하는 상태가 요구되며, 이는 곧 소설의 인위성, 즉 소설가의 ‘성찰적인’ 면과 연결됩니다. 소설가가 지극히 ‘소박’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성찰적’일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작가가 될 것입니다. (p71)

소설 쓰기의 가장 즐거운 측면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설가는 오로지 주인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고, 서서히 주인공과 닮아 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p73)

소설가들은 먼저 아주 특별한 영혼의 소유자인 주인공을 창안해 낸 다음, 주인공이 원하는 A, B, C의 소재나 경험으로 끌고 들어가는 식으로 작업하지 않습니다. 소설가들은 먼저 A, B, C라는 소재를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후에 이 소재들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주인공들을 상상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해 왔습니다. 다른 모든 작가도 인지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p77)

나에게 소설 쓰기는, 풍경 속에서(세계에서) 소설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 감정, 생각 등을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앞서 언급한 소설을 구성하는 그 수천 개의 작은 점들을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를 그리며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p84)

4. 단어, 그림, 사물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p92, 시각적/단어적 이분법에 대해)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의 단어를 가지고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p93)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만년필로 써 나가고 있는 종이를 보는 것만큼이나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내가 쓸 문장을 한 편의 그럼처럼, 내가 쓸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떠올리려고 애씁니다. (p93)

한 편의 소설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단어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소설 읽기를 그림 보기보다 더 참여적이며 사적인 일로 만듭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내가 스물두 살 때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소설이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정도가 그림에 비해 훨씬 더 깊기 때문입니다! (p98)

5. 박물관과 소설

체스 선수가 상대의 다음 공격을 추측하며 경기하듯, 소설가는 독자의 상상력을 계산에 넣으며,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이 충동 또한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독자의 머릿속이 어떻게 작동할지 추측하는 작업은 소설가의 여러 출발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p123)

만약 소설을 소설이게 만든 것이,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평범한 일상생활을 관찰하여 얻은 결과 가운데 두드러지는 면을 추출해 상상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유르스나르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소설 예술이 겨우 19세기에야 완성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p126)

마치 박물관이 사물을 보존하는 것처럼, 소설은 인간의 평범한 생각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건너뛰곤 하는 이성의 불연속성을 구어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묘미와 색과 냄새를 보존합니다.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합니다. (p127)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 내재된 핵심 패러독스는 소설가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p138)

나는 이 딜레마-진실을 쓰고 싶은 충동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실러가 괴테에게서 찾았고, 내가 편견의 눈을 통해 미국 또는 서구 작가들에게서 찾아냈던 ‘소박함’에 기대는 수밖에 없겠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고통에 매몰된 나머지, 그 끔찍한 경험들을 정체성의 일부로 끌어안아 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소박함을 지키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결국 어느 순간 오로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카르스에 대해 써 버릴 수는 없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소설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박물관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p142)

6. 중심부

“모비딕”처럼 어떤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줄거리와 중심부가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 소설의 탁월함과 심오함의 표시입니다. “모비딕”은 우리가 계속해서 중심부의 존재를 느끼며, 계속해서 탐색해야 하는 특별하고 예외적이며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소설의 중심부가 어디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해서 바꿔 가며 읽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한 이유가 풍경의 풍부함과 캐릭터의 다양성이라면, 또 다른 이유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숙하며 가장 계획적인 소설가들조차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쓴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생각을 고쳐 나가기 때문입니다. (p150)

중심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추측하려고 애를 쓰며 읽는 경험 많은(성찰적인) 독자가 그러하듯이, 경험 많은 소설가 역시 소설을 써 나갈수록 중심부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이 중심부를 찾아서 명확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집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작업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p151)

내가 ‘중심부’라고 부르고 우리 소설가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이 지점은 무척이나 중요해서, 그것을 상상 속에서 바꾸기만 해도 소설의 모든 문장, 모든 페이지가 바뀌고,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숲 전체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p152)

위대한 순문학 소설을 찾는 이유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듯이 느끼고 삶의 의미를 알려 줄 지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우주와의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은(이제 소박한 독자에서 성찰적인 독자로 변모한) 스스로 나아갈 바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실러가 그랬듯이, 어떤 정신 상태와 문학 형식을 연결 짓겠다는 뜻입니다. 청년 시절 나는 정신적인 결핍감 때문에 형이상학, 철학,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도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십 대에 거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흥분해서 중심부를 찾으며 읽었던 소설들 대부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에서 삶의 의미 또는 세상의 중심부를 탐색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들의 작가, 예컨대 톨스토이, 스탕달, 프루스트,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울프에게서 얻은 통찰로 나 자신을 계발하고, 나의 세계관과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p154)

나에게 소설의 중심부는 어떤 소설이 종국에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해 주고, 암시해 주고, 보여 주고, 경험하게 한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p156)

순문학 소설에서 중심부가 무엇인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마치 삶이 그러하듯이 순문학 소설 역시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 우리가 중심부가 분명한 소설을 읽지 않고, 순문학 소설을 읽는 기본적인 충동 가운데 하나는 중심부가 무엇이며 삶에 관한 우리의 관점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성찰하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입니다. (p157)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 (p163)

순문학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서로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세상에 유일한 중심부는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신과 물질, 인간과 풍경, 이성과 상상이 서로 구별되는 데카르트주의 세계는 소설의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어떤 힘과 권위의 세계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p166)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 텍스트를 판단하거나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동원하기보다는 우리 상상 속에서 세세하고 뚜렷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그 그림들 속에 들어가 사방에 지각을 열어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중심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각을 끝까지 열고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소설 속으로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p166)

나에게 소설 쓰기란, 새로운 단락, 장면, 세부 사항 들을 추가하고, 새 캐릭터들을 찾아 그들과 동일화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빼거나 더하고, 몇몇 장면과 대화를 빼거나 더하고, 소설을 시작할 때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덧붙여 중심부를 서서히 제자리에 앉히는 작업입니다.  톨스토이가 대화 도중에 아주 단순한 공식을 언급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주인공이 지나치게 악한 사람이라면 약간 선한 면을 더해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면 약간 나쁜 면을 더해야 한다.” 나 역시 같은 소박한 태도로 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소설을 쓰다가 중심부가 아주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그것을 약간 감춥니다. 반대로, 중심부가 너무 깊숙하게 감춰져 있으면 약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p168)

콜리지에 따른면 워즈워스는 “평범한 것에 새로움의 매력을 부여하고 초자연적인 무엇인가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성을 습관의 마약에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지력을 우리 앞에 있는 세상의 기쁨과 멋짐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썼습니다. 35년 동안 소설을 써 오면서 나는 이 말이 내게 소설 예술을 가르쳐 준 가장 위대한 작가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프루스트, 토마스 만을 위한 말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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