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

얼마 전 심적으로 꽤나 힘들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아 이 책을 읽었고 도움을 받았다.
책을 읽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지금껏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었는데, 이 책의 일부가 나를 움직여 행동하게 했었다는 점에서 내게는 의미 있고 고마운 책이다.
행동의 결과가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지만…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105)

심리적 CPR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p110)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공감하는 일은 응급실 당직 의사처럼 상대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의무가 되면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p120)

자신을 드러내도 될 만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무장 해제를 한 것이다. (p155)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p167)

A의 상반된 두 가지 접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같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A의 극과 극 두 대처법은 두 가지가 아닌 같은 대처법이었다. 나는 없고 너(상사)만 있는 관계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그러니 결과가 같은 것은 당연하다. 이전의 A는 상사 앞에서 입을 다물고 대면을 피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지웠다면, 최근의 A는 자기 존재를 상사의 욕구 충족의 도구로만 여기며 자기 존재를 지웠다. 상사에게 A는 이전부터 지금까지 전 시기에 걸쳐 존재감이 없는 존재다. 이전의 A는 상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근의 A는 상사의 욕구를 적극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했다. A는 언제나 상사의 존재를 중심으로 반응하는 도구였지 개별적인 한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상사가 A를 개별적 존재로 인지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A 스스로가 적극적인 심리적 공모자가 되어준 것이다.
자기 경계를 허물면서 상대방의 도구가 기꺼이 돼주는 사람의 개별적 희망과 기대는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까지 애쓰면 그래도 고마워하겠지, 내 노력을 알아주겠지’ 하는 A의 기대가 물거품의 된 건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자신을 스스로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의 인식 속에서도 사라진다. 회피도 충성도 답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해야 한다. 그가 나를 의식할 수 있도록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너(상사)도 있지만 나도 있는 관계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무모하거나 위험해 보이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유일하고 근원적인 방법이다. 그의 인식 속에 내 존재감이 생겨야만 그와 나의 관계에서 일관되던 그의 일방성에 제동이 걸린다. 그가 나를 의식해야 그의 일방성이 주춤하기 시작한다.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대칭적이고 상호적으로 서서히 변한다. (p 201)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끊어야한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로 삼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p204)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얼마든지 있다.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상황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다. 깊은 성찰은 여러 갈래의 길과 전망을 보여준다. 복잡한 갈래 길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불안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진다. 이럴 때의 불안은 건강한 불안, 건강한 혼란이다. 입체적 통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건강한 불안을 외면하면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사라진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마다 다르다. 고정값이 아니므로 개별적 상황마다 다시 성찰해야 알 수 있다. (p 217)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감정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가르는 시각은 한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공감하는 일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p 219)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p 294)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어떤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은 어땠는데? 핑퐁게임 하듯 주고받는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p 295)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