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과 기억 사이의 간격은 점점 커진다.
때로는 그 간격이 너무 커져서 사실과는 전혀 다른 기억이 과거의 삶을 차지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후회나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 등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나타나는데, 이는 아마도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과 관계있는 심리적 기제이지 않을까 싶다.(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심리학적 용어가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본능이 기억에서 지워버린 과거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이 누군가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면?
그리고 40년이 지난 후 자신의 본능이 지워버린 과거의 참담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죽기 전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가?
이제껏 모르고 잘 살아왔는데, 말년에 예상치 못한 회한을 가져온 운명을 원망해야 하는가?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p11)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01)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 – 말로, 소리로, 사진으로 – 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어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p106)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p111)

아마도 사실은, 그렇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결국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별종은 못 돼서 그런 것 같다. (p114)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p162)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회한(remorse)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회한의 감정은 그와 같다.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 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는지 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은 가히 고대의 저주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는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랬었다. 말이 씨가 된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 행위 자체 – 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 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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