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어봐야겠다.

(p105)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소비에트인이 된다는 것은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은 용어상 모순이었다. 권력층은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을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논리가 있는가? 그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방식과 표현으로, 음악 관료들과 신문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였다. 용어상 또 하나의 모순이었다.

(p110)
그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오직 개 짖는 소리였다. 그 끈질기고 히스테릭한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끊어놓았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를 개보다 좋아했다. 고양이들은 항상 그가 작곡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p120)
그가 생각할 때 무례함과 독재는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는 레닌이 자신의 정치적 유서를 구술시키고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를 때, 스탈린의 큰 결점을 ‘무례함’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서 ‘독재자’로 감탄스럽게 묘사되는 지휘자들이 보기 싫었다. 최선을 다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자들, 지휘봉을 잡은 황제들은 그런 표현을 즐겼다 – 마치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하고 멸시하고 굴욕을 주어야만 그들이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듯이.
(…중략…)
그것은 단지 자부심의 문제거나, 음악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에게 고함을 지르고 욕을 퍼붓고, 소란을 벌이고, 지각한 클라리넷 제1주자를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는 그런 수모를 다 참고, 지휘자의 등 뒤에서 험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그의 ‘진짜 사람됨’을 보여주는 험담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이 지휘봉의 황제가 믿는 대로 믿게 되었다. 즉, 채찍질을 당해야만 연주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이 마조히스트적인 무리는 옹기종기 모여서 가끔씩 서로 비꼬는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지도자의 고귀함과 이상주의, 목적의식, 쓰레기로 버려져 책상 뒤로 날려가버리는 자들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지도자를 존경했다. 거장은 가끔 가혹할 때도 있지만 다 그럴 만해서 그런 것이며, 따라야 할 위대한 지도자였다. 자, 이래도 오케스트라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누구인가?

(p126)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젊은이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 나이 대에는 아이러니가 성장을 막고 상상력을 저해한다. 남을 믿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이에게 솔직히 대하는, 활기차고 개방적인 마음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다 세상사와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아이러니의 감각을 발전시킬 때가 온다.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진행 방향은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감각은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려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기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어서, 아이러니는 갑작스럽게 이상한 방식으로 쑥 자라났다. 버섯처럼 하룻밤 새, 암처럼 무시무시하게.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음악, 그의 가족, 사랑. 사랑, 그의 가족, 음악. 중요도는 바뀔 수 있었다.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아이러니가 자식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열 살 먹은 막심은 학교에서 음악 시험 중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야만 했다. 이런 처지에 갈리야와 막심에게 아이러니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p182)
개인교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유명한 작곡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위대한 지도자와 비교해본다면 당신은 어떤 분일까요?”
트로신이 다르고미시스키의 로맨스 가사는 잘 모를 거라 짐작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지도자에 비하면 저는 벌레지요, 벌레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진짜로 벌레예요. 그리고 이제야 당신이 건전한 자기비판 의식을 갖게 된 듯해서 다행입니다.”
그는 이런 칭찬을 좀 더 원한다는 듯이 할 수 있는 한 진지하게 되풀이했다. “예, 저는 벌레입니다. 벌레일 뿐이지요.”
트로신은 이러한 발전에 대단히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작곡가의 서재에는 모스크바에서 살 수 있는 것 중 제일 멋진 스탈린 초상화는 끝내 걸리지 않았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에 대한 불과 두어 달간의 재교육 기간 동안 소비에트 현실의 객관적인 환경이 바뀌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탈린이 죽었다. 그리고 개인교사의 방문은 끝이 났다.

(p233)
그를 아는 이들은 그를 알았다. 귀가 있는 이들은 그의 음악들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하는 식대로만 이해하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런 이들이 어떻게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제 겁에 질린 얼굴이 공식 차량을 타고 지나쳐갈 때, 길가에 서 있는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그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것이 우리를 위해 삶이 구상하는 비극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p257)
그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주는 것. 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제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 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 답이 질문자의 머리 뒤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말,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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