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 – 이언 매큐언]


2018021203~20180208

이언 매큐언의 1997년 소설. 원제는 Enduring Love.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두고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흡인력 있는 플롯. 오늘 밤 잠을 잘 생각이라면 아예 책을 잡지 말라. 최고의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최고의 작품”이라 평했다지만 나는 두 달이 넘게 이 책을 잡고 있었다. 지루하게 이어진 연말 연초의 회사 일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독한 일이 정리되자마자 다시 잡아 읽고 마무리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는 망상장애증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지는 이야기 자체가 스릴 넘치기도 하지만,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변해가는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는 것 또한 흥미롭다.

책의 말미에 ‘붙임 1’로 덧붙여진 논문을 읽고, 자연스럽게 저자가 이 논문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검색해보니 이 논문 또한 저자가 지어낸 픽션이라고 한다. 이 픽션 논문의 저자로 기재된 로버트 웬(Wenn)과 안토니오 캐미어(Camia)라는 이름도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애너그램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

https://en.wikipedia.org/wiki/Enduring_Love

이 사실로 왠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결국 저자의 위트가 담긴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산사태를 야기한 조약돌 하나, 그리고 흩어진 대열, 원인 제공자, 하지만 도덕적 책임은 없는 행위자. 이타주의에서 이기주의로 기울어진 무게. 겁에 질렸던 탓일까, 아니면 합리적인 계산에서 나온 행동일까? 우리는 정말 그를 죽였는가, 아니면 그저 그와 함께 죽기를 거부했을 뿐인가? 하지만 우리가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와 함께 그대로 있었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p81)

계단에는 아직 클라리사의 디올 향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향을 맡으니 왠지 위안이 됐다.(p88)

자기 설득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이었다. 나는 어느 오스트레일리아 잡지에 여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순전히 탁상공론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대충 이런 식이었다.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해 살고 있다면(인간이 늘 그렇게 살아왔듯)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와 흥미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게 자기가 잘 먹고 잘 사는 기본이다. 그러려면 때로 교활한 술책을 써야 할 때도 있다. 먼저 스스로를 납득시킨다면, 그래서 굳이 자기가 하는 말을 믿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다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건 문제없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번성했다. 그들의 유전자도 번성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하찮은 일로 다투고 입씨름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적 능력이란 언제나 자기 주장이 지닌 허점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거나 모른 척하도록 도와주니까.(p148)

궁전은 버킹엄 궁전, 왕은 조지5세, 궁정 밖의 여자는 프랑스 인, 때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였다. 그녀는 수차례 영국에 와서, 사모하는 왕을 얼핏이라도 보기만을 바라며 궁 문밖에 서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었다. 그녀는 왕을 만난 적도 없었고, 또 그 이후로도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깨어 있는 매 순간 왕을 생각했다. …(중략)… 그녀는 평생을 이런 미망의 감옥같은 암흑 속에서 살았다. 버림받은 울분으로 가득 찬 그녀의 사랑은 그녀를 치료한 프랑스 정신과 의사에 의해 하나의 증후군으로 분류되었고, 그 의사는 그녀의 병적 열정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p175)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갈등이라는 것에도 자연적인 수명이 있다. 죽어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이 관건이다. 때를 잘못 판단해서 뱉은 말은 전기 충격처럼 작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갈등은 병원체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자기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말이, 혹은 사태를 병적으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는 ‘새로운 시각’이 갈등을 맹렬히 소생시키는 것이다.(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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