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Podcast를 통해 들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 옮겨 놓는다.
문학적 소명을 촌충에 비유하여 작가로의 삶의 무게를 전하고 있는데, 어찌 작가의 삶만이 그러하겠는가?
사업을 하든 예술을 하든, 날씬해지기 위해 촌충을 집어 삼켰던 19세기 여인들과 같은 저돌성이 없이는 뭐든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기로 지금까지의 나는 촌충을 집어 삼킬만한 용기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러므로 뭔가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용기의 부재를 탓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문학에 대한 이 취미를 그대는 일종의 종속처럼, 하나의 노예살이처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대의 결정은 그대로 하여금, 자기의 뚱뚱해진 몸매를 확인하고 크게 놀라 날씬함을 되찾고자 촌충(寸蟲)을 삼키는 19세기의 여인들과 가까워지도록 할 것입니다. 뱃속에 이 끔직한 기생충을 지닌 누군가를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있습니다. 고로 이 여인들은 가히 영웅적일 뿐 아니라 미의 순교자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관찰한 사람은 60년대 초 파리에 살던 호세 마리아라는 멋진 스페인 친구로 그는 화가이자 영화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어찌어찌하여 촌충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몸속에 자리잡은 촌충은 그와 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붙어 양분을 취하면서 장성했고, 그는 그만큼 쇠약해졌습니다. 촌충이 이용하고 식민지화하는 호세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촌충을 몰아내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호세 마리아는 점점 야위어갔습니다. 자기 창자 안에 자리잡은 벌레의 식욕을 잠재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먹고 마셨지만 (특히 우유를) 말입니다. 문제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촌충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몽파르나스의 한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 한다네. 극장과 전시회에 가고, 서점에 들르며, 여러 시간 동안 정치, 책, 영화, 친구에 대해 토론하지. 그러나 내가 이 일들을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나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나의 촌충을 위하여 그 일들을 한다네. 그렇게 느껴져.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내 주인 행세를 하는 촌충을 위해 사는 셈이네.〉

이날 이후로 나는 작가의 상황을 뱃속에 촌충을 지닌 내 친구 호세 마리아의 상황과 즐겨 비교하곤 합니다. 문학적 소명은 심심풀이나 스포츠나 자유시간을 이용한 세련된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하고 배타적인 활동이고 절대적인 특권이며 자청해서 받아들인 예속인바, (행복한) 희생자를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내 파리 친구의 촌충처럼 문학은 항구적인 활동이 될 뿐 아니라, 글쓰기에 투자하는 시간을 넘어서 다른 모든 활동에까지 전염되는 하나의 실존적 행위가 됩니다. 숙주로 삼는 육체에 기생하는 긴 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은 작가의 삶을 먹고 삽니다. 플로베르가 말했듯, 글을 쓰는 것은 삶의 한 방식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이 아름답고 흡입력 강한 소명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살기 위해 쓰지 않고 쓰기 위해 삽니다.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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