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김영하]

역시나 감각적이고 세련된 작품이다.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는 성장 소설.
민수와 지원이 끝내 다시 만나는 해피 엔딩이 좋았다.

라마찬드란 박사라는 사람은 팔을 잃은 사람들의 환지통을 없애는 간단한 장치를 개발했다고 한다. 거울을 이용해 잘린 팔이 다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환자의 눈을 속이는 것이었다. (p18)

“남자가 조심해야 할 여자에는 세 종류가 있어.” 최여사는 뭐든 셋으로 정리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첫째, 논개 같은 여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절대 알 수가 없거든. 갑자기 돌변해서 사내를 껴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들지, 둘째 황진이 같은 여자. 똑똑하고 재주 있고 예쁘지. 그렇지만 영원히 내 여자로 만들 수가 없어.” (p24)

여자를 달래는 것은 권투에서 잽을 먹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언제 상대방을 다운시키나 싶지만 계속 하다보면 꽤 효과가 있다. 잽이 안 통한다고 갑자기 강력한 펀치를 날려서는 안 된다. 그럼 모든 게 파장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p28)

그리스 수사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연설을 할 때는 감동을 주든가 아니면 지식을 줘라. 그것도 안 되면 즐겁게라도 해줘라. (p67)

“레스토랑에는 원래 좋은 자리라는 게 많지가 않아. 좋은 게 흔할 리 없잖아?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자리에 불만을 갖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손님들이 자리를 고르면 말이야, 결국 그 자리에 앉자고 주장한 사람이 그 원망을 뒤집어쓰게 되는 거야. 그러나 레스토랑 측에서 정해서 앉혀주면 적어도 자기들끼리 자리 가지고 원망하지는 않아. 원망을 하더라도 레스토랑 쪽을 비난하겠지. 그리고 말이야, 의외로 선택을 내리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더라구. 차라리 누가 대신 정해줬으면 하고 바란단 말이야. 그러니까, 들어오는 손님보고 아무 데나 편한 데 앉으라고 하는 건 친절이 아니라 불친절인 거야.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권위 있는 지배인이 자리를 정해서 앉혀주는 거야. 권위적인 명령도 때로는 친절인 거지.” (p79)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p195)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 미셸 투르니에.” (p269)

“(…) 독일에 한 사업가가 있었는데, 아, 이 사람은 아마추어 수학자이기도 했는데, 하여튼 이 사람, 돈은 되게 많았대. 큰 회사를 운영했었다나봐. 그런데 어느 날 자살을 하려고 자기 서재로 갔어. 자정이 되면 실행해야지 결심을 하고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대. 초조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재에 있는 책 한 권을 무심코 뽑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얘기가 들어있었나봐.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은 간단한 정리가 몇백 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 책상에 앉아 그걸 풀어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던 거야. 죽기로 결심한 자정은 벌써 지나가버린 거지. 아, 이 정리가 내 생명을 구했구나 싶어 이 사업가는 거액의 상금을 내걸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푸는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선언하고 말이야.” (p300)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 나, 실은 이 말이 너무 좋았어. 너는 영혼, 모험 그리고 의미라는 말을 한 문장 안에 사용하고 있어. 나는 그게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 (p320)

‘오빠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랄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 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지. 안그래?’ (P350)

내 마음속의 패배주의는 언제나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돈이 왜 필요해? 그런 돈 없이도 잘살아왔잖아?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이런 달콤한 유혹이 실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의 다른 버전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p452)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