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저 | 문학동네 | 2012년 02월

2012년, 저자가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검은 꽃』 『퀴즈쇼』를 잇는 ‘고아 트릴로지’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퀴즈쇼”는 아직 못 읽어봤지만, “검은 꽃” 보다는 그 구성이나 스토리가 좀 탄탄치 못한 느낌이고 깊이 빠지기에는 왠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롤로그에 언급된 밧줄마술 이야기가 이후의 스토리를 기대하게 만들었었는데, 그 이후의 스토리가 이런 기대에 못 미쳐서였을까?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이 소설을 쓰게된 과정에 해당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저자의 고민 과정에서 Y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이전에 쓰던 원고에서 방향을 바꿔 ‘동규가 기록한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가공했기에 결국은 소설로서의 매력이 조금은 떨어지는 작품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 말고도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p26)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p29)

받아만 준다면 나는 그들 사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슬픔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러니까 서러움에 가까운 감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이 차가워지는, 비애에 가까운 심사도 있다. 그날의 나는 후자였다. 마음에 서리가 낀다고 해야 할까. 심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눈가가 시렸다. (p57)

이를테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가 헛소리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는 평등하게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똑같이 먹어대지만 갇혀 있는 우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개들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p65)

“스쿠터를 타고 달린다는 건 말야.”
음색에 장난기가 서린 어떤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요요를 가지고 노는 것하고 비슷해. 길이 스쿠터의 영혼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거야. 우리는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길을 감아들였다 다시 놓아주는 거라고 할 수 있어. 길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어.” (p76)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만다.’ (p77)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p134)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나무를 베기 전에 나무에게 용서를 구했대. 그들은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알았던 거야. 나무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들은 나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돼. 평생 보던 나무를 베어 없앤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아. 그들에겐 화폐가 없었어. 사물과 그들은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었어. 돈을 받고 일한다는 의식이 너의 참인식을 가로막았고 그 때문에 너는 큐브를 느낄 수 없었을 거야.” (p138)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제이는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전했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 아이들은 제이가 자기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존재라고 느꼈고, 그의 기이한 생활 태도에 경외심을 품었다. (p141)

나는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의 영혼은 위스키 상자로 쌓은 탑을 다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타고 올라 자신이 떠나온 세상을 내려다볼 위태로운 탑. 그것은 필경 무너질 것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그 추락의 목격자가 될 것이었다. (p155)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p160)

용기,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일소에 부치는 허세에서 온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허세와 광기를 구별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광기의 제이가 그들 위에 설 수 있었다. (p160)

알에서 깨어난 바다거북은 드디어 바다에 다다른 것일까? 잠복해있던 제이의 본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기가 권력이라는 것,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p161)

제이가 목란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 순간, 목란에 대한 나의 욕망도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목란에게 빠졌던 건 바로 제이가 그녀를 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p170)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서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무지에 대해 불편한 수치심을 품고 있었다. 여기 물을 담은 풍선이 있다고 하자. 풍선이 터지면 물이 갑자기 쏟아질 것이다. 그 안에 든 것이 만약 슬픔이라면 내 몸은 슬픔에 젖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그게 무슨 색인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풍선을 내가 자의로 터뜨려버린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슬픔은 그대로 슬픔일까?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죄책감이 슬픔을 덮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죄책감으로 슬픔을 ‘돌려막는’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가 아닐까? (..중략..)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혼란은 결국 살인의 환상으로 귀결되었다. (p172)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거야.” (p229)

제이는 자신의 영혼이 그의 육체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디에도 깃들지 못한 채 내내 떠돌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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