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왈츠 –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 저/권은미 역 | 민음사 | 2012년 09월

책 제목이 왜 이별의 왈츠일까?
야쿠프의 조국과의 이별?
야쿠프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질투에 사로잡혔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며 클리마와 이별을 통해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카밀라의 클리마와의 이별?
베르틀레프와의 하루 밤의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었으나 야쿠프의 파란 독약으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루제나의 삶과의 이별?

“십오 년도 더 되었지. 이 약을 지닌 지. 감옥에 갔다 온 이후,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어. 적어도 하나의 확신이 필요하다는 거야. 자신의 죽음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고, 또 그 방법과 때를 선택할 수 있다는 확신 말이야. 그런 확신이 있으면 많은 일들을 견뎌 낼 수 있지. 언제든지 원할 때 최악의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아는 거지.” (p135)

“이 나라에선 이런 것들을 언제 필요로 하게 될지 절대로 몰라. 그리고 그건 내게 원칙의 문제야. 모든 인간은 성년이 되는 그날 독약을 받아야 한다고 봐. 그걸 위해 엄숙한 예식도 거행되어야 하고. 자살을 고취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큰 확신과 평온을 누리며 살기 위해 말이야. 자신의 삶과 죽음이 자기 손에 달렸다는 걸 알면서 살기 위해서지.” (P136)

노인들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기 배 속에 든 것을 아주 강렬하게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야말로 성스럽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녀를 변모시켰으며 격상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이 개 잡는 미치광이들과 구별 지어 줬다. 그녀는 자신에겐 포기할 권리가 없노라고, 자신에겐 타협할 권리가 없노라고 생각했다. 그녀 배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기에, 미래로 가는 유일한 입장권이 있기에 말이다. (P145)

야쿠프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졸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금발 아래로 보이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때 그는 자기가 간호사에게 독약이 든 약통을 준 건 우연이 아니라(즉 의식이 마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수년 전부터 기회를 엿보던 오랜 욕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강해 결국은 그런 기회를 만들고야 만 그런 욕망 말이다. (p242)

프란티셰크와 클리마도 이미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간청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을 때 다가오는 그 말 자체를, 거짓 없고 순수한 그 말 그대로를 그녀가 들은 것은 그날 저녁이 처음이었다. 그 말은 마치 기적처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절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루제나에게는 더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뿐, 어떤 설명도 동기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p273)

질투는 정열을 쏟는 지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정신을 사로 잡는다. 그때 정신은 단 일 초의 휴식도 없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권태를 모른다. (p283)

그의 살인은 야릇했다. 동기 없는 살인이었다. 그 살인은 살인자를 위한 어떤 이익도 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 살인의 단 하나의 의미, 그것은 분명히 그가 살인자임을 그 자신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다.
실험으로서, 그리고 자아 인식 행위로서의 살인, 이는 그에게 뭔가를 환기했다. 그래, 라스콜리니코프였다. 인간이 열등한 자를 죽일 권리가 있는지 알려고, 그리고 자신이 살인을 견딜 힘이 있는지 알려고 사람을 죽였던 라스콜리니코프였다. 그 살인을 통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
더욱이 야쿠프는 모든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원하며, 단지 두 가지, 즉 처벌의 두려움과 살인을 행하는 데 따르는 물질적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사실만이 인간들에게 살인을 단념케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쿠프는 모든 인간들이 몰래, 그리고 멀리서 살인할 수만 있다면 인류는 몇 분 후면 사라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실험은 완전히 헛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했다.(p352)

두꺼운 안경을 쓴 아이는 연못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돌이 된 듯 창문에 붙어 서 있었다. 그리고 야쿠프는 이 아이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 그리고 영원히 나쁜 시력으로 살아가도록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하는 부분이란 바로 그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고 있던 것이요, 무거운 쇠창살처럼 그들이 지니고 살아야만 하는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고매한 정신에 대한 어떤 특권도 없으며, 최고의 고매한 정신이란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옅은 파란색 알약을 되새겨 보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던 그 간호사의 약통에 마치 변명처럼, 그들의 대열에 넣어 달라는 요구처럼,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되길 늘 거부해 왔지만 이젠 그들 사이에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하는 간절한 부탁처럼 그 독약을 집어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국경을 행해 다시 출발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는 이 순간이 안도의 순간일 것이며 즐거이 이곳에서 떠나리라 생각했다. 그가 실수로 태어나게 된 곳, 또는 사실 자기 자리가 아니었던 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이 그의 유일한 조국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조국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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