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최근들어 흠뻑 빠져있는 작가 박민규…
그가 4번의 이직 끝에 결국 사표를 쓰고 아무 대책없이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지만, 2003년 제8회 한겨례문학상을 안겨주며 그를 작가로 만들어 준.. 그런 의미있는 소설이다.

때론 너무 웃겨 미친 사람 마냥 혼자서 킥킥대기도 하고, 때론 가슴 아픈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혀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버렸다.
덕분에 아련했던 초기 한국 프로야구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고, 물론 “나” 또는 “조성훈”처럼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불사조’ 박철순은 왜 삼미 슈퍼스타즈를 두려워했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기사 하나)

“태어날 때부터 작가는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는 작가이고자 한다.”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 그의 각오(?)와도 같이 오래도록 많은 좋은 작품을 써 주는 작가가 되길 기대해 본다.

인상 깊었던 구절들

p127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P129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O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확실이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O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 – 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p199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 – 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p203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 –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구가 위도와 경도로 나뉘어 있듯 – 결국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분할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p223
나는 단 한 차례의 지각도 결근도 한 적이 없다. 27개의 교차로와 대교로서는 몹시도 서운한 일이겠지만, 설사 그것이 270개의 교차로와 끊어진 대교였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뒤집어 본다면, 가정에 대해선 언제나 지각이나 결근을 했다는 말이 된다.

p225
그리고 나는 – 별 무늬가 박힌 잠바와 모자, 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잡동사니들을 어루만지며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과거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왜 그동안 한 번도 과거를 기억하지 않은 걸까.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바빴다. 언제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랬다. 생각하면 나에게도 왕년이 있었다. 촌스런 별 무늬처럼, 느닷없고 보잘것없던 청춘의 1,2년. 순간 인정하기 싫은 것은 – 그래도 그 순간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단 잔인한 사실. 대저 그것이 클라이맥스였다니, 우리의 삶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p235
“처음 널 봤을 때… 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p242
요는 말이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라는 것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요는,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가 분명 속았다는 것이지.
속아?
그럼,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참으로 운 좋게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p244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었지.

…(중략)…

하여간에 당시 정권은 이 세상을 <프로화>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어. 그리고 그걸 눈치 챈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삼미 슈퍼스타즈였지. 삼미는 이미 스프링 캠프로 향하던 그 순간 이 야구가, 이 세상이, 모두의 삶이 어떤 판도로 흘러갈 것인가를 전부 예측하고 있었던 거야.

…(중략)…

아무튼 그런 절차를 통해 놈들이 바랐던 프로의 세계가 구축되었던 거야. 놈들은 계속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프로의 슬로건들을 만들어 나갔지.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다, 프로의 세계에선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프로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프로는 쉬지 않는다. 자기 관리는 프로의 기본이다. 프로는 끝없이 자신을 개발한다. 프로는 능력으로 말한다. 프로는 잠들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물론 놈들은 그때부터 삼미를 주목하고 있었지. 도대체 그런 시점에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을 목표로 내건다는 건 눈치가 없어도 여간 없었던 게 아니니까.

p250
삼미의 마지막 리그였던 그 85년의 전기 리그는 실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야. 왜? 삼미는 결국 끝까지 걸어갔고, 그 리그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자신의 야구>를 완성했으니까. 이는 정말 위대한 업적이야. 전성기의 뉴욕 양키스나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결코 <자신의 야구>를 완성하지는 못했어. 아니, 결코 그 어떤 프로 팀도 <자신의 야구>를 완성한 적은 없었지. 왜?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승이었으니까.

…(중략)…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중략)…

던져! 잡아! 뛰어! 쳐! 빨리, 빨리 달려! 라고 하는데, 그 속에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를 견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중략)…

세계의 여건?
물론이지. 우리는 미국의 프랜차이즈니까. 언제나 이 점을 잊어선 안 돼.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p257
하루 3시간만 일하고, 굶어죽지 않고, 나머지 21시간은 내 것이다 – 가 신문 배달 때와 하나 다름없는 놈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나는 – 퇴직금을 까먹으며 그냥 놀기로 했다. 4년 내내 미친놈처럼 일을 했고, 그 퇴직금으로 밥을 먹지만, 하루 24시간이 내 것이다 – 가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의 자랑이었다.

p259
자식, 잘 나간다 싶었더니 삼천포로 빠졌구나.
라는 말을, 들었다. 엘리트들 중에는 간혹 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을 예사롭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엘리트 학생복을 입은 채 명문고를 나오고, 역시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의 요직에라도 앉으면 그럴 위험성은 상당히 높다. 게다가 ROTC라도 했다면 끝장이다. 최악의 경우는 게다가 어릴 때 줄반장과 보이 스카우트 활동을 겸한 것이고, 게다가 교회의 집사라도 된다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즉 무슨 말을 하건 그냥 듣고 넘기는 게 상책인 것이고, 그는 이 모든 이력의 집합체였다. 보이 스카우트의 핀잔을 들은 걸 스카우트처럼 나는 다소곳이 앉아 생각했다.

p262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그 시절도, 실은 국수의 가락처럼 끊기 쉬운 것이었다. 빙하기가 왔다는 그 말도 실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과거의 나뿐이다.

p264
하루는 산책을 하며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p278
비록 윤회론자가 아닐지언정 나는 그 일주일의 어느 어귀쯤에서 – 지금의 삶이 무언가 본리그를 앞두고서 행하는 일종의 전지 훈련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전지 훈련의 어느 어귀쯤에서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p284
그리고 – 과도기고 뭐고 간에 여하튼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1999년이 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인류는 과도기만을 보내다가 멸종한 우주의 유일한 종이 될 것 같았다. 마치 회사 생활만 줄기차게 하다 돌연사로 최후를 마감하는 한 명의 인간처럼.

…(중략)…

무렵의 나는 겨울잠을 준비하는 오소리처럼 – 내 인생의 일, 내 인생에 대한 생각들을 잔뜩 끌어 모아, 도토리의 산을 쌓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토리의 산을 남겨둔 채 이제 더는 남의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남의 일’이라면 할 만큼 했다.
때문에 – 그 도토리들을 일일이, 야금야금 깨물어 삼키면서도 틈틈이 러닝을 하고 보란 듯이 나의 ‘야구’를 했다. 이 얼마나 길고 충만한 겨울인가. 즉 나로서는 너무나 길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겨울이었다.

p289
올스타즈의 투수도 만만치 않았다. 변화구가 주무기인 선수였는데 끝이 살아 있는 슬라이더가 제법 예리한 – 꽤나 수준급의 투구였다. 근본적으로 치기 힘든 공이었으므로, 아무도 치지 않았다. 그것이 프로 올스타즈와 우리의 가장 큰 차이였다. 혀를 내두르지도, 방망이를 내두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p298
첫 결혼 때에 비해 우리의 재산이 너무나도 줄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 우리는 참으로 간단하게 행복할 수 있었다. 가진 게 간단하면 인생은 간단해진다.

p302 (‘작가의 말’ 중)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어차피, 지구도 멸망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에 대한 2개의 생각

  1. 예성영

    나만 킥킥대고 읽은 게 아니구나. 10여분 쉴새없이 그랬더니 신물이 다 나더라고. 정말 재밌게 읽었고, 가슴 아리게 읽었다. 나도 박민규 팬됐다. 추천해줘서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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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브렛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박민규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민규 소설은 다 모아놨으니 나중에 원하는 시점에 빌려줄께. 이 분 소설은 너무 한번에 몰아보면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천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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