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2008년 12월부터 6개월간 yes24 블로그를 통해 연재되었던 작품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kirinshoof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쉽지 않은 소재부터, 소설 군데군데 양념처럼 등장하는 문화코드, 요한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그리고 소설 속의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천재성이 느껴지는 구성까지…
여운이 많이 남는, 정말 훌륭한 소설이라 느꼈고, 훌륭한 작가라고 느꼈다.

소설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예술 작품들

벨라스케스 – Las Meninas(시녀들), 모리스 라벨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로버타 플랙 –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s, 비틀즈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닐영 – Heart of Gold, UFO – Lipstick Traces, 비틀즈 – Something, 비틀즈 – Black Bird, Pink Floyd – Dark Side of the Moon, 장 그르니에 – 섬,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영화 Back to the future, 모리스 라벨 모음곡집 어미 거위(Ma Mere L’oye) 중 두 번째 곡 난장이(Petit Poucet), 비틀즈 – Strawberry Fields Forever,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Der Lindenbaum), 슈베르트의 <송어>,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밥 딜런 <The Freewheelin’>

인상 깊었던 구절들

p39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p156
아니, 당연한 거야.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74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너나, 나나… 인간은 다 그래.

p185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p192
덧없이 짧은 겨울이었지만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보잘것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p195
매우 이상한 이유이긴 하지만, 그 “요” 때문에 나는 대학을 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럴 듯한 학교를 나오고, 그럴 듯한 직장을 얻고, 그럴 듯한 차를 굴리고, 그럴 듯한 여자를 얻고, 그럴 듯한 집에서 사는… 그럴 듯한 인간이 되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럴 듯한 인간은 많아도 그런, 인간이 드문 이유도… 그럴 듯한 여자는 많지만 그런, 그녀가 드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지만, 열아홉 살의 나는 미처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p200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p219
즉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p226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 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 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늘 그랬듯
….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이를테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 상상이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 태양이 돌잖아? 해도
와와 하지 않고,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거야.
….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p238
그런 삶이, 설사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저도 여태 로 알고 있었어요, 라고 말해 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행복할 거라 나는 생각했었다.

p416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418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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