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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그동안 많이 사 모았다.
이제는 책을 읽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모든 책들을 당장 읽고 싶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대로 심사(深思)하고 나만의 오독(誤讀)을 통해 시습(时习)하고자 한다면 서두르면 안될 것이다.

Someday.
“I’ll do it some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See? There is no Someday.

It’s time to ride.
(p15, 할리데이비슨 광고 카피 중)

우리에게는 심사, 깊이 생각함이 빠져 있는 듯합니다. 많이 읽는 게 제일이잖아요. 1년에 100권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심사할 시간이 없죠.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는 많이 읽었을지 몰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불분명합니다. 책 속의 지식이 진짜 내 것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学而时习之)’도 같은 얘기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 아는 문장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시습(时习), 즉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려는 노력입니다. 이 문장을 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양적으로 부족하더라도 주관적인 이성으로 내가 책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소중한 지식이 된다는 사실도요.
(p20)

어떤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을 이렇게 직선으로 놓고 봤을 때, 9할은 기존(旣存)이랍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내가 살고 있는 당대, 내가 타고난 삶의 조건 등 대부분의 것은 기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거시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나머지 1할인데, 그것의 9할은 기성(旣成)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어요. 저는 이제 오십대이고, 남자로 태어났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미 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고, 어떤 성취들도 했죠. 이건 끝난 겁니다. 되돌릴 수 없어요. 이것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 1할의 1할입니다. 바로 미성(未成)이죠. 미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하루입니다. 이불 개고 일어나, 오늘의 강독을 열심히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과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함께 TV도 보고 잘 자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p117)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달력’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38억 년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이 나타났을 때가 언제인가 하면 7만 년 전이랍니다. 138억 년을 1년으로 치면 인류의 출현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의 일이라는 거죠. 인류 전체가 고작 남은 한 시간 반의 시간을 살고 있어요.
(p144)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재보다는 그 소재를 해석해내는 카잔차키스의 역량을 높이 봤습니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그 부분입니다. 여행지 자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여행지를 소재로 한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죠.
일반적인 여행서는 대상에 대한 객관을 담습니다. 기차표가 얼마이고, 맛집이 어디에 있고 하는 식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대상에 대한 저자의 사색’이 주제가 됩니다. 이 사람 외에는 건져 올릴 수 없는 것들이죠. 오늘 소개해드릴 기행문들을 읽을 때에는 그것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p182)

지금까지의 여덟 번의 강독은 아마 저의 오독(誤讀)이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기꺼이 오독을 하시길 바랍니다. 정독은 우리 학자들에게 맡겨둡시다. 우리는 그저 책 속의 내용을 저마다의 의미로 받아들여 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각자의 오독을 합시다. 그래서 그로 인해 좀 더 풍요로워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p348)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p105)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소비에트인이 된다는 것은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은 용어상 모순이었다. 권력층은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을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논리가 있는가? 그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방식과 표현으로, 음악 관료들과 신문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였다. 용어상 또 하나의 모순이었다.

(p110)
그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오직 개 짖는 소리였다. 그 끈질기고 히스테릭한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끊어놓았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를 개보다 좋아했다. 고양이들은 항상 그가 작곡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p120)
그가 생각할 때 무례함과 독재는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는 레닌이 자신의 정치적 유서를 구술시키고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를 때, 스탈린의 큰 결점을 ‘무례함’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서 ‘독재자’로 감탄스럽게 묘사되는 지휘자들이 보기 싫었다. 최선을 다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자들, 지휘봉을 잡은 황제들은 그런 표현을 즐겼다 – 마치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하고 멸시하고 굴욕을 주어야만 그들이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듯이.
(…중략…)
그것은 단지 자부심의 문제거나, 음악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에게 고함을 지르고 욕을 퍼붓고, 소란을 벌이고, 지각한 클라리넷 제1주자를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는 그런 수모를 다 참고, 지휘자의 등 뒤에서 험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그의 ‘진짜 사람됨’을 보여주는 험담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이 지휘봉의 황제가 믿는 대로 믿게 되었다. 즉, 채찍질을 당해야만 연주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이 마조히스트적인 무리는 옹기종기 모여서 가끔씩 서로 비꼬는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지도자의 고귀함과 이상주의, 목적의식, 쓰레기로 버려져 책상 뒤로 날려가버리는 자들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지도자를 존경했다. 거장은 가끔 가혹할 때도 있지만 다 그럴 만해서 그런 것이며, 따라야 할 위대한 지도자였다. 자, 이래도 오케스트라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누구인가?

(p126)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젊은이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 나이 대에는 아이러니가 성장을 막고 상상력을 저해한다. 남을 믿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이에게 솔직히 대하는, 활기차고 개방적인 마음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다 세상사와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아이러니의 감각을 발전시킬 때가 온다.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진행 방향은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감각은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려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기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어서, 아이러니는 갑작스럽게 이상한 방식으로 쑥 자라났다. 버섯처럼 하룻밤 새, 암처럼 무시무시하게.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음악, 그의 가족, 사랑. 사랑, 그의 가족, 음악. 중요도는 바뀔 수 있었다.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아이러니가 자식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열 살 먹은 막심은 학교에서 음악 시험 중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야만 했다. 이런 처지에 갈리야와 막심에게 아이러니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p182)
개인교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유명한 작곡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위대한 지도자와 비교해본다면 당신은 어떤 분일까요?”
트로신이 다르고미시스키의 로맨스 가사는 잘 모를 거라 짐작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지도자에 비하면 저는 벌레지요, 벌레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진짜로 벌레예요. 그리고 이제야 당신이 건전한 자기비판 의식을 갖게 된 듯해서 다행입니다.”
그는 이런 칭찬을 좀 더 원한다는 듯이 할 수 있는 한 진지하게 되풀이했다. “예, 저는 벌레입니다. 벌레일 뿐이지요.”
트로신은 이러한 발전에 대단히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작곡가의 서재에는 모스크바에서 살 수 있는 것 중 제일 멋진 스탈린 초상화는 끝내 걸리지 않았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에 대한 불과 두어 달간의 재교육 기간 동안 소비에트 현실의 객관적인 환경이 바뀌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탈린이 죽었다. 그리고 개인교사의 방문은 끝이 났다.

(p233)
그를 아는 이들은 그를 알았다. 귀가 있는 이들은 그의 음악들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하는 식대로만 이해하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런 이들이 어떻게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제 겁에 질린 얼굴이 공식 차량을 타고 지나쳐갈 때, 길가에 서 있는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그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것이 우리를 위해 삶이 구상하는 비극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p257)
그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주는 것. 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제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 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 답이 질문자의 머리 뒤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말,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2013년 3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연재된 김연수 작가의 ‘여행의 낙수'(낙수: 추수한 뒤에 땅에 떨어져 있는 이삭)를 단행본으로 펴낸 책
내가 좋아하는 이 작가의 책이 나온다길래 한 달 전 예약 구매해 두었던 책을 필라델피아-뉴욕 여행 기간 동안 틈틈이 읽었다. 브라이언트 공원 Reading Room에 홀로 앉아 서서히 깨어나는 뉴욕 6th avenue의 아침을 맞으며 이 책을 읽었던 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뒷부분 몇 편은 못 읽은 채로 남아있긴 하지만, 언젠가 다시 있을 다음 여행에서 마저 읽으려고 남겨둔다.

(p39)
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다면 당연히 육체적으로야 여행하기에 수월하겠지만, 여행은 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지갑을 구경시켜주다가 여행 경비를 털리거나, 책만 믿고 깊은 밤 문을 닫은 호텔까지 걸어서 찾아가는 등 우리가 여행지에서 하는 멍청한 일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런 일 앞에선 몇 년 동안 헬스클럽을 다니며 단련한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속수무책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정신력뿐이다. 낯선 지방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구급약과 함께 이 정신력을 꼭 챙겨야 한다. 그것에 기대어 너무나 서툴러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버젓이 저지르는 자신을 견뎌야 한다.
여행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건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행에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가 되는데, 이 젊은이란 사실 실제적인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밖에.
물론 예외는 있다. 잘 짜인 패키지 관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이쯤이면 왜 효도 관광은 예외 없이 패키지로 떠나는 것인지 알겠지.
여행은 그렇다 치고, 그게 인생이라면 어떨까? 서투른 자신을 보는 게 싫다고 패키지 인생을 선택한다면? 이번 여름 여행지에서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이런 사랑 – 이언 매큐언


2018021203~20180208

이언 매큐언의 1997년 소설. 원제는 Enduring Love.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두고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흡인력 있는 플롯. 오늘 밤 잠을 잘 생각이라면 아예 책을 잡지 말라. 최고의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최고의 작품”이라 평했다지만 나는 두 달이 넘게 이 책을 잡고 있었다. 지루하게 이어진 연말 연초의 회사 일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독한 일이 정리되자마자 다시 잡아 읽고 마무리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는 망상장애증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지는 이야기 자체가 스릴 넘치기도 하지만,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변해가는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는 것 또한 흥미롭다.

책의 말미에 ‘붙임 1’로 덧붙여진 논문을 읽고, 자연스럽게 저자가 이 논문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검색해보니 이 논문 또한 저자가 지어낸 픽션이라고 한다. 이 픽션 논문의 저자로 기재된 로버트 웬(Wenn)과 안토니오 캐미어(Camia)라는 이름도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애너그램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

https://en.wikipedia.org/wiki/Enduring_Love

이 사실로 왠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결국 저자의 위트가 담긴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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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 이언 매큐언


20180210~0218

최근 찾아 읽고 있는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2016년 작품.

태아가 어머니 배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 참을성 있게 두 팔을 엇갈려 모으고서, 기다리고 기다리며, 나는 누구 안에 들어 있고,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궁금해한다. 내 반투명 자루, 내 생각 풍선 안 전용 바다에서 천천히 공중제비를 하던 과거, 나를 가둔 투명한 경계에,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공모자들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동시에 그로 인해 진동하는 은밀한 막에 가볍게 부딪히며 꿈결처럼 떠돌던 그 시절을 추억할 때면 향수에 젖어 눈이 감긴다. 태평한 어린 시절이었다. 이제 나는 완전히 뒤집힌 자세로 한 치의 여유 공간도 없이 두 무릎을 배에 바싹 붙이고 있으며, 머리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밤낮으로 빌어먹을 벽에 귀를 붙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듣고, 마음에 새기고, 걱정한다. 나는 그들이 잠자리에서 나누는 끔찍한 모의를 들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에, 내가 연루될 수도 있는 사건에 공포를 느낀다.(p9)

어머니인 트루디와 어머니의 애인이자 삼촌인 클로드가 시인인 아버지 존 케언크로스를 독살하기로 공모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태아의 입장으로 목격하면서 분노하고, 번뇌하고, 복수를 꿈꾼다.
태아의 번뇌는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인간적이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이….

아내와 동생에게 속아 독약이 든 스무디를 마실 위기에 처한 아버지에게 전하는 글에서는 절박함과 위기감이 느껴지고,

그러니 다시 한번 그 시를 아버지의 죽어가는 숨결로 제게 읊어주세요. 그럼 저도 아버지께 그 시를 읊어드릴게요. 그 시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듣는 마지막 말이 되게 해주세요. 그러면 아버지도 제 뜻을 아실 거예요. 아니면, 더 친절한 길을 택하세요. 죽지 말고 살아서 아버지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 품에 절 안아주시고, 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주세요. 그 보답으로 충고 하나 드릴게요. 계단을 내려오지 마세요. 큰 소리로 태평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차를 타고 떠나세요. 만일 내려오게 되더라도 과일 음료는 사양하고 작별인사를 나눌 만큼만 머무세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그때까지, 전 아버지의 순종적인 아들로 남아….(p116)

아버지의 죽음 후 복수를 위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적인 분노가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나는 최후의 수단이 될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마지막 기회다. …(중략)…빨리 말하겠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아기의 죽음. 그건 내 삼촌이 임신 말기의 임산부를 상대로 무모한 성행위를 한 결과 발생한 사실상의 살인이다. 그의 체포, 재판, 선고, 투옥. 그러면 아버지의 죽음에 절반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죽음이라는 나 자신의 감옥은 벽이 너무도 높다. 나는 멍청한 존재의 운동장으로 도로 나가떨어진다.
마침내 클로드가 그 혐오스러운 무게를 거둬들이고 – 그의 막된 간결성에 경의를 표한다 – 다리가 저리긴 하지만 내 공간이 복원된다. 트루디가 탈진상태로 축 늘어져 다시 회한에 젖어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회복되어간다.(p170)

독살의 혐의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 클로드와 트루디가 도주를 시도하는 순간 우리의 주인공은 예정일 이주일 앞서 세상에 태어남으로 어머니와 삼촌의 도주를 실패로 만들고 이로써 결국 아버지 죽음에 대한 복수를 이루게된다.

연이은 진통의 파도, 고함과 울부짖음, 고통이 멎게 해달라는 애원이 계속된다. 무자비한 진전, 가차없는 배출. 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뒤에서 탯줄이 풀린다. 나는 앞으로, 밖으로 나아간다. 냉혹한 자연의 힘이 나를 찌부러뜨리려 한다. 내가 지나는 곳은 삼촌의 일부가 반대쪽에서 너무도 자주 드나들었던 그 구간이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그의 날에 질이었던 것이 지금은 자랑스러운 산도, 나의 파나마운하고 나는 그보다 훨씬 크다. 아주 오래된 정보라는 화물을 싣고 위엄 있게 천천히 나아가는 위풍당당한 유전자의 배다. 뜨내기 남근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한동안 나는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온몸이 쑤신다. 하지만 지금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내 어머니다. 모든 어머니처럼 머리 크고 시끄러운 아기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비명을 지르는 내 어머니.
왁스를 바른 듯한 길을 삐거덕거리며 내려오다가 주르륵 미끄러지는 순간, 나는 벌거숭이로 여기, 왕국에 자리한다. 굳센 코르테스처럼(언젠가 아버지가 읽어준 시를 기억한다) 경이감에 차서. 나는 경탄과 추측의 눈으로 보풀이 인 파란 목욕 수건의 표면을 내려다본다. 파랑. 내가 늘 알고 있었던 색이다. 최소한 언어적으로는. 나는 늘 파란 것들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 바다, 하늘, 청금석, 용담 – 그저 추상일 뿐이었다. 이제 마침내 그걸 갖는다. 나는 그걸 갖고,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감히 믿었던 것보다 더 근사하다. 그건 색 스펙트럼의 남색 쪽에서의 첫 시작일 뿐이다.(p260)

이 혐오스러운 불륜에 의한 치정극은 갓태어난 우리의 주인공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안정을 되찾고 곧 다가올 어머니의 형벌을 아무런 감정 없이 예감하며 마무리된다.

어머니가 나를 움직여 우리는 긴 시선을 교환한다. 내가 기다려온 순간이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사랑스럽다. 머리색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진하고, 눈동자는 더 옅은 초록, 두 뺨은 아까 애를 써서 아직까지 빨갛고, 코는 정말 작다. 나는 그 얼굴에서 세상 전체를 보는 듯하다. 아름답다. 다정하다. 살인적이다. 클로드가 체념한 발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준비된 말 같은 건 없다. 나는 이 휴식의 순간에도, 탐욕스런 시선으로 오래도록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택시를 생각한다. 낭비다. 택시를 보낼 때다. 그리고 우리의 감방에 대해 – 너무 좁지는 않기를 – 육중한 감방문 너머로 뻗은 낡은 계단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처음에는 슬픔, 그다음은 정의, 그다음은 의미. 나머지는 혼돈이다.(p263)

작가의 폭넓은 지식들도 그렇지만 이것들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는 솜씨는 역시나 감탄스럽다. 옮긴이가 친절하게 이곳 저곳 주석을 달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많은 문학적 차용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며 읽었을까 싶다.
여기에 고전(햄릿)을 모티브로 하고, 태아를 화자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창의적인 발상까지 더해지면서 그만큼 더 매력적으로 읽혔다.

우연의 음악 – 폴 오스터


1990년 작품
최근들어 시작만하고 끝내지 못한 책이 서너권이나 되었다. 집중력과 끈기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원래 기질이 그러하고,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질을 이겨낼 힘을 점점 잃어가는 것 같다.
폴 오스터의 책을 집어 든 것은 왠만해서는 중간에 포기하지 못할 흡인력 강한 책을 선택하자는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뉴욕3부작, 리바이어던 등 몇 권의 책을 통해 이 분의 책이라면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간에 포기는 하지 않았지만 완독에 2주가 걸리고 말았다.
나쉬가 무작정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포지를 만나 운명을 건 도박을 하게되는 장면까지는 흠뻑 빠져서 순식간에 읽었지만, 모든 돈을 잃고 빚까지 지게되어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해 벽을 쌓는 부분부터는 또 다시 흥미를 잃고 결국 2주라는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쉽지만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음으로 결말지어지는 순간까지 한달음에 읽을 수 있었다면 책 전반에 걸친 무거운 분위기와 나쉬의 심리 상태의 변화, 나쉬와 포지가 쌓는 벽의 의미 등 작품을 보다 리얼하게 느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다.

그나저나 운명의 도박 장면에서 나쉬가 훔친 플라워와 스톤의 미니어처 인형은 뭔가 반전을 위한 복선일 것이라 기대되었는데, 그냥 그렇게 불에 타 사라지다니… 대체 무엇인가?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지 모르겠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마루야마 겐지

제목(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과 부제(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가 전부였다. 나약한 청춘들을 위해 호되게 꾸짖는 것도 좋고 그 주장도 대부분 공감하지만 제시하는 방향이 극히 추상적이란 느낌이다.
부모, 가족, 국가, 직장, 종교, 사랑 따위에 휘둘려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말고, 굳은 신념과 이성적인 태도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라는 저자의 말은 왠지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쥐꼬리만 한 월급과 상여금과 퇴직금을 빌미로 지시에 따르기만 해야 하는 인형 취급을 당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된 무지갯빛 꿈을 꾸는 동안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직장을 떠날 때는 이미 기력도 체력도 다 바닥나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는 함정에 내던져진다. 그 다음은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참한 상황만 남을 뿐이다.
그때 그들은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슴속으로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p47)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돈은 그 일로 벌고, 취미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도 많다. 하지만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고 기분 전환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 중용적인 선택은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현명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p100)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때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292)

소설가의 일 – 김연수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글을 쓰는 성실성이라는 작가의 말은 마치 학력고사 수석자가 과외 한번 없이 교과서 위주의 열공으로 이런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이야기 만큼이나 허무하게 들린다.(그렇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인 것이다!) 그러나 살아보면서 느끼지 않았던가. 그것이 진실이란 것을…
그러니 매일 쓰자.

호두과자기계처럼 논리적이고 절도 넘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진짜 소설기계를 원한다면, 여기서 내가 그 설계도를 공개하겠다. 재능 따위는 그만 떠들고, 이 설계도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소설기계로 만들어보기 바란다. 이건 1932년 자신의 첫 소설인 [북회귀선]을 쓰면서 헨리 밀러가 창안한 11계명이다.

  1. 한 번에 하나씩 일해서 끝까지 쓰라.
  2.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검은 봄](헨리 밀러의 두번째 소설)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마라.
  3. 안달복달하지 마라. 지금 손에 잡은게 무엇이든 침착하게, 기쁘게, 저돌적으로 일하라.
  4.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계획에 따라서 작업하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만써라!
  5. 새로 뭘 만들지 못할 때도 일은 할 수 있다.
  6.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7. 늘 인간답게!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곳에 다니고, 내킨다면 술도 마셔라.
  8. 짐수레 말이 되지 말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져야 한다.
  9. 그러고 싶다면 계획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계획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몰입하라. 점점 좁혀라. 거부하라.
  10. 쓰고 싶은 책들을 잊어라. 지금 쓰고 있는 책만을 생각하라.
  11.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다음에.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중에서

내 젊은 날의 숲 – 김훈

나무의 줄기에서, 늙은 세대의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잡고, 젊은 세대의 나이테는 껍질 쪽으로 들어서는데, 중심부의 늙은 목질은 말라서 무기물화되었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무위의 세월을 수천 년씩 이어가는데, 그 굳어버린 무위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땅 위에 곧게 서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수목생리학에서 배웠다. 줄기의 외곽을 이루는 젊은 목질부는 생산과 노동과 대사를 거듭하면서 늙어져서 안쪽으로 밀려나고, 다시 그 외곽은 젊음으로 교체되므로, 나무는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삶에서는 젊음과 늙음, 죽음과 진행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다.

[컬럼] 김선우의 빨강 – 그래야 사람이다.

내겐 발목을 적시는 불편함에 불과한 물이 누군가에겐 턱밑을 치받는 물이라면 내 불편함 정도는 견뎌주는 게 사람이다. 그래야 내 턱밑까지 물이 찼을 때 누군가 자신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를 구해준다. 그러라고 사람은 함께 사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69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