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내고 맞는 첫 봄이다. 어젯밤과 아침 사이에 새 찬 봄비가 내렸고 이곳 너가 잠들어 있는 공원에는 물안개가 짙게 깔려있다. 너를 보내고 가을, 겨울을 보냈다. 그 계절들 속에서 너의 무덤은 떨어진 낙엽과 메마른 풀들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생기 넘치는 풀들과 민들레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멀리서는 그 위치를 찾아내기 힘들 정도다.
풀을 헤치고 네게 다가가 언제나와 같이 너를 덮고 있는 흙을 지그시 밟아 주었다. 잠들어 있는 네가 나를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느낄 수 있도록…. 봄이 더 짙어 지고 여름이 오면 이 풀밭은 더 무성해지고 온갖 벌레들과 생물들로 넘쳐나 이렇게 너를 지그시 밟아 주기도 힘들겠지. 가을이 돌아와 네가 다시 너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너가 다시 나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잘 있기를 바랄게
오랜만에 일정 없는 휴일을 맞아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길을 나섰다. 가파도에 가볼까 하는 흐릿한 계획이 있기는 했지만 꼭 가파도일 필요는 없었다.
마침 모슬포 남항으로 가는 버스가 와서 몸을 실었다. 비가 가끔씩 흩날리고 바람이 조금 센 느낌이어서 가파도행 여객선이 운항할지 잠시 의심이 들었으나, 가파도에 못가면 올레길을 걸으리라 생각했다. 역시나 바람 때문에 가파도행 여객선이 모두 결항이란다. 사전 정보 없이 왔던 관광객 몇몇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모슬포 남항 옆 바닷가 벤치에 앉아 바다와 구름을 바라봤다. 먹구름에 둘러싸인 흰 구름 속에서 가을이 모습이 떠올랐다. 앞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 안았을 때 내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모습, 장난감 낚싯대 미끼를 잡으려 뛰어오르는 모습, 여러 모습의 가을이가 그 속에 있었다. 한참 동안 구름 속 가을이를 보고 앉아있다가 올레길을 걸으려던 생각을 접고 타고 왔던 버스를 되돌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화분집에 들러 흙을 샀다. 이번 주에 하려고 마음 먹었던 일, 가을이가 묻힌 곳에 새 흙을 덮어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한 달 남짓 사이에 가을이가 묻힌 곳 주변에 푸른 풀들이 새롭게 자라났는데, 돌을 쌓아둔 그곳은 흙이 타들어가듯 까맣고 습한 느낌이 들어 마음에 걸렸었다.
가을이를 뭍은 자리 위에 쌓아 두었던 돌무더기를 모두 치우고 그곳에 고운 흙을 두텁게 덮었다. 그리고 가을이가 있었을 때 사 두었던 귀리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발로 꾹꾹 밟아주었다. 캣그라스가 고양이 헤어볼에 좋다고 사 키웠지만 정작 가을이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아 더이상 심지 않고 서랍 속에 남겨 두었던 귀리 씨앗들.
이제 겨울이 다가온다. 이번 주 들어 날이 많이 차가워졌다. 귀리든 잡초든 뭐든 푸른 식물들이 어서 자라나 가을이를 따뜻하게 덮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혼자라는 외로움과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가며 또다시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 무엇이 그들의 삶을 이 끝없는 여행으로 이끌었을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이제 세상에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남겨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
펀은 유랑의 길을 선택한다. 그 끝없는 여행의 길에서 제각기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만나 유대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에 몸을 맡기며 물처럼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 펀의 상실감은 잠시라도 치유될 수 있었을까?
아픔이 짙게 밴 펀의 몸짓 하나하나가 쓸쓸함을 표현하고 있었고,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쓸쓸함을 더 짙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대사도 많은 여운을 남긴다.
Fern : I’ve been thinking a lot about my husband, Bo. When it got really bad at the end, they had him in the hospital on morphine drippin’. I was sitting there at night in the hospital. And… I’d wanna put my thumb down on that morphine drip just a little bit longer. So I could let him go. Maybe I should’ve tried harder. So he could’ve gone sooner without all that pain.
Swankie : Maybe he wouldn’t have wanted that. Maybe he was trying to stay with you as long as he could. I’m sure you took good care of him, Fern.
Fern : Bo never knew his parents, and we never had kids. If I didn’t stay, if I left, it would be like he never existed. I couldn’t pack up and move on. He loved Empire. He loved his work so much. He loved being there, everybody loved him. So I stayed. Same town, same house. Just like my dad used to say: “What’s remembered, lives.” I maybe spent too much of my life just remembering, Bob.
Bob : One of the things I love most about this life is that there’s no final goodbye. You know, I’ve met hundreds of people out here and I don’t ever say a final goodbye. I always just say, “I’ll see you down the road.” And I do. And whether it’s a month, or a year, or sometimes years, I see them again.
Bob : I can look down the road and I can be certain in my heart that I’ll see my son again. You’ll see Bo again.And you can remember your lives together then.
Nomadland (2020)
Dedicated to the ones who had to depart. See you down the road.
우리집에 적응한 가을이는 하루가 다르게 아기 티를 벗고 조금씩 야무진 어린이 고양이로 성장했다.
이 무렵 가을이는 좁은 자기 방을 뱅글뱅글 뛰어다니곤 했다. 그 짧은 다리로 있는 힘을 다해 빠른 속도로 뱅글뱅글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다 지치면 숨을 몰아쉬며 웅크리고 앉아있곤 했었다. 이런 가을이의 모습을 보며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다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되었다. 이 무렵 가을이를 찍은 사진들을 보면 흔들리지 않은 사진이 없을 정도로 잠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우다다” 거리며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런 가을이를 보며, “가을이는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이 무렵이 가을이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조금 더 자라 어른 고양이 티가 날 때 즈음부터는 이렇게 “우다다”하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움직임이 줄어들고 작년, 나와 함께 제주도로 이주한 이후는 눈에 띄게 움직임이 줄어 들었음에도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나의 큰 잘못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을이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것이고 그것이 가을이의 움직임을 줄어들게 만들고, 줄어든 움직임이 가을이의 건강을 더 악화시켰을텐데 그러한 과정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럽다.
가을이가 떠나간 지금, 온 방을 뱅글뱅글 뛰어다니던 어린 가을이의 모습이 그립다. 그 어딘가 아프지 않은 곳에서 8년 전에 너가 그랬던 것처럼 맘껏 뛰어다니고 있기를……
너는 나를 등지고 누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런 너를 나는 바라보고 앉아있다. 언젠가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봐주길 바라면서. 마치 그곳에 네가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너가 있었을 때,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있었고, 5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런 나를 너는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때의 너도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너를 바라봐주기를 바랬겠지만, 많은 경우 그러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너는 구석진 너의 집 안으로 들어가 긴 잠을 청했겠지.
지금 너는 그곳에서 깨어날 수 없는 긴 잠을 자고 있다. 눈을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는 서로를 마주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80km, 6시간 40분 라이딩을 했다. 목 뒷부분이 가끔 따가울 정도의 햇볕과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시원한 바닷바람과 쉼없이 들려오는 파도소리. 이 모든 것이 지금이 바로 가을임을 말하고 있었다. 가을.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나는 그동안 휴일이면 대체로 오전엔 가까운 바닷가 라이딩, 오후엔 일주일 치 수업 준비를 했었다. 그러니까 아직 가을이가 항상 내 곁에 있을 때는 말이다. 함께 일하는 친구는 내게 하루 쉬는 날을 이용해 제주 곳곳을 다니면서 제주 생활을 즐기라고 했지만 할 일이 많아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닐 수 없었던 것은 해야 할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루종일 가을이를 혼자 두기 미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양이는 혼자서도 잘 사는 독립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나는 가을이가 혼자서는 외로움을 탔었다는 것을 안다. 몇 시간의 부재 후 돌아왔을 때 가을이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시크한 녀석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었는지, 그 말 없는 녀석이 마치 “대체 날 혼자 두고 어딜 다녀오는 거야?” 하듯이 짧게 야옹 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가을이답게 대놓고 반가움을 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침 9:20 배 시간을 맞추려면 1시간 안에 비양도행 배가 출발하는 한림항까지 이동해야 했다. 거리는 17km. 자전거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길이라 자전거로 움직인다는게 옳은 결정인지 망설여졌다.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는 좁은 차도라면, 경사가 생각보다 심하다면, 무엇보다 자전거로 간다면 되돌아올 체력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에 대한 계산이 잘 안 되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생각으로 일단 라이딩에 나섰다.
어떻게든 잘 되었다. 배 시간에 맞춰 한림항에 도착했고, 배에 자전거도 실을 수 있었다. 비양도에 머문 2시간 동안 비양도를 한 바퀴 돌고, 호돌이 식당에서 보말죽을 먹고, 비양봉에도 올라갔다. 비양봉에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니 섬이 정말 작았다. 섬 반대편으로 내려와 섬을 반 바퀴 더 돌고 나니 딱 돌아오는 배 시간에 맞았다.
20211005-비양도의 백구
한림항에 돌아와 왔던 길과는 다른 해안도로를 쭉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금능 해수욕장의 바다 색은 이전과 같이 매력적이었고, 신창해안로의 거대한 풍차들은 여전히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해안로를 따라 몇 십 km를 라이딩하니 마치 내가 제주도민인 듯 해안 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관광와서 자전거를 빌려 행복한 표정으로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아마도 육지에서부터 실어 왔을 자신의 자전거로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에 도전하는, 옷차림새나 자전거로 보나 전문 라이더 같이 보이는 라이딩 팀들. 순수한 운송수단으로 앞 바구니에 장 본 물건들을 가득 싣고 천천히 달려가는 노년의 주부들. 제각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있는 와중에 나는 혼자 아무 목적없이 아무 생각없이 반복적인 동작으로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다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80km, 6시간 40분을 타게되었다. 자전거로 나선 길은 어쨌든 자전거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으니…
피곤함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좋겠다 싶었는데, 다리 통증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을이 생각을 하다 새벽녘에야 선잠에 들었다.
가을이를 떠나보낸 후 가을이가 내 팔에 남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파상풍 주사를 맞았고,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2년마다 제공하는 건강검진을 하고,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끝냈다. 건강검진과 백신 접종은 이전부터 정해진 일정이었으나 하필 가을이가 떠난 직후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이런 일들을 하게 되니 가을이에게 더 미안해진다. 가을이 건강을 미리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든다.
조금씩 옅어져 가기는 하지만 아직 혼자 있는 시간이 고통스럽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가을이가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혼자 잠들어야 할 시간이 되면 현실을 잊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화를 봤다.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 (A Street Cat Named Bob)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영화였다. 마약 중독으로 비참한 삶을 살던 제임스와 길 고양이 밥의 만남은 그 둘 모두에게 운명이었고, 그 후의 일들은 거의 기적이라 할만했다. 마약을 끊고 길거리 공연과 빅이슈 판매 등으로 힘겨운 삶을 버텨가는 오랜 시간들 속에 제임스와 밥은 항상 함께 있었고,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줬을 것이다.
올레길 16코스를 걸었다. 15Km 남짓한 길을 3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올레길 16코스는 의외로 해안길보다 산길이 더 길었다.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 같았다. 원래는 17코스를 걸을 생각이었는데 진입로에서 실수로 방향을 반대쪽으로 잡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16코스를 걷게 되었다. 어차피 그저 지칠 때까지 걷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16코스인지 17코스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걷는 내내 가을이를 생각했다. 가을이가 아팠던 마지막 순간들만 떠올라 걸으면서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들을 애써 떨쳐버리거나 일부러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비대성심근증(HCM), 폐수종, 이뇨제, 혈전용해제, 후지마비.. 며칠 동안 귓가를 맴돌았던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몇 달 사이 눈에 띄게 움직임이 줄어든 가을이의 상태에 의심을 갖고 미리 병원에 데리고 가 검진을 했었더라면, 추석 연휴 이틀 동안 가을이를 홀로 두고 창원에 다녀오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었다면, 처음 증상을 보였을 때 제주시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가을이를 데리고 갔었다면…. 의미도 없는 가정들이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흐린 하늘의 하얀 구름 속에도,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의 하얀 포말 속에도 어디에나 아픈 하얀 가을이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가을이가 사용하던 물품들을 정리했더니 방 한 가득이다. 대형 후드 화장실, 포장도 뜯지 않은 모래와 사료, 간식들. 음수량 늘리는데 꽤나 도움을 줬던 세라믹 정수기, 가을이가 혹시나 탈출할까봐 현관에 설치해두었던 철제 팬스…. 그중 쓸모 있을만한 것들을 골라 당근마켓에 올렸더니 올리자마자 거래 요청이 빗발쳤다. 절반은 오늘 모두 거래되었고, 나머지도 조만간 알 수 없는 어떤 고양이의 일용품이 되어 주겠지.
첫 거래를 하고 가을이를 찾아가 거래 사실을 알렸다. 네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미안하다고….
이것은 가을이를 잊기 위함이 아니다. 일상에서 무방비 상태로 가을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그런 슬픔을 이제 겪고 싶지 않았다. 가을이와의 추억은 내 맘 깊숙이 넣어두고 내가 준비되는 순간에만 그 안으로 들어가 살짝 만나고 오고 싶다. 그래야 좀 더 오래오래 가을이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